'백화점'에 관한 낡은 기억
‘백화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은 엄마손을 잡고 따라갔던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내 고향 대구에서 가장 유명한 백화점은 ‘대구 백화점’ 이다. 지금은 롯데 백화점, 현대 백화점 등 타지역 백화점들이 진출해 주도권을 쥐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대구 백화점’은 대구 시민들에게 가장 '고품격'의 쇼핑장소이자, 문화공간이자, 약속 장소였다.
그런 대구백화점에서 엄마와 나는 많은 것들을 했다. 어떤 날은 아무런 목적 없이 백화점을 구경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엄마나 아빠 옷을 사러 가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백화점 맨 꼭대기 층에 있는 경양식 집에서 조금은 값비싼 ‘돈까스’를 먹으러 가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백화점에 가면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처럼 당시엔 흔하지 않았던 ‘신기한 것’들을 탈 수 있었기에 즐거웠다. 또 지하에 마련된 ‘분수 광장’이나 옥상에 있는 ‘옥상 정원’에 앉아 아픈 다리를 달래며 쉬었던 기억도 생생하며, 무엇보다 그런 장소에는 동전 백원을 넣으면 1~2분간 작동하는 간단한 놀이시설이 있어 나를 설레게 했다.
지금의 나에게도...
백화점에 대한 지금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을 오고 나서는 용돈이 넉넉하지 못해 ‘소비의 주체’ 로서 백화점을 찾는 경우는 드물지만, 가끔은 돈 없고, 목적 없이 백화점이라는 공간을 ‘유영하듯’ 돌아다니며 ‘아이쇼핑’이나 데이트를 즐기기도 하고, 또 가끔은 인터넷에서 봐둔 물건을 직접 만져보기 위해 백화점을 찾기도 한다. 또 요즘은 백화점 내에 영화관이 입점해 있는 경우가 많기에 영화를 기다리면서 백화점에서 ‘시간을 죽이기’ 도 한다.
이런 백화점은 나에게 소비의 공간이자, 휴식의 공간이자, 문화의 공간이자, 흥미의 공간이자, 욕망의 공간 인 것 같다. 또 기억의 공간이자, 친밀하면서도 가끔은 낯선 공간이기도 하다.(낯설음은 주로 90년대 후반 이후의 트렌드인 ‘명품관’에서 느낀다.) 이처럼 현대의 가장 대표적인 대중소비 공간인 백화점은 단지 ‘소비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사람마다 자신의 입장과 경험에 따라 다른 ‘의미의 층위’를 가지는 공간이다. 백화점이라는 공간의 의미의 층위가 이처럼 다양할 수 있는 것은 80~90년대 이후 한국 사회가 경제적 성장을 하면서 백화점이라는 공간이 한편으론 일반 대중들에게 친밀한 공간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우연히 백화점 한 켠에 마련된 푹신한 소파에 몸을 뉘이고 화려하게 꾸며진 쇼윈도와 조명들을 바라보며 백화점에 대한 저런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그 때 너무나도 친밀하고 일상적이라 깨닫지 못했던 백화점의 ‘다른 얼굴들’이 보이면서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심층적으로 백화점을 ‘분석’해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 일련의 작업의 시작은 이 때 느꼈던 일상적 공간에 대한 ‘흥미’에서 전적으로 비롯된 것이다.
'백화점'을 'text'로 삼는다는 것은...
'text'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를까? 혹시나 이 글을 중, 고등학생들이 읽는다면 ‘교과서’가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고, 대학생들이 읽는다면 ‘책’이나 ‘논문’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인터넷 시대인 요즘은 인터넷 상에 올라가 있는 수많은 페이지들이 떠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의 공통점은 주로 ‘문자’로 이루어진 것들이라는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text'라는 말이 담고 있는 뜻 중에 가장 일차적인 의미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text’라는 말의 의미를 이 일차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좀 더 확장시켜 생각 할 수도 있다.
확장된 'text'의 의미를 살펴보기 전에 우선 기본적이고 일반화된 ‘text’의 의미부터 짚어보고 넘어가자. 텍스트란 ‘일련의 기호집합체’이다. 텍스트란 “독자들에게 특정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어떠한 맥락(context)안에서 작가가 의도하고, 정렬(arranged)하고, 선택한 기호들의 집합적 실체”이다. ‘의미’를 갖는 기호들의 구조 혹은 질서화된 상징체들이 곧 텍스트인 것이다. 텍스트는 항상 상징을 지니고 있고, 이 상징은 바로 인간의 실천의 산물이다. 텍스트는 특정한 역사적 맥락 속에 살고 있는 주체들이 상호의사소통 과정에서 ‘상징’을 조합하고 사용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김왕배, 2000) 이점에서 ‘구텐베르크 은하계’ 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text’는 바로 책으로 대표되는 문자로 ‘써진 것들’ 이다.
하지만 이러한 ‘text'의 의미를 좀 더 확장해서 생각 할 수도 있다. 텍스트는 말한 것, 쓰인것뿐 아니라 이미지, 조각, 건축형태, 음악, 신체적 운동 등 다양한 형태를 포함하고 있다. 좁은 의미에서 텍스트는 “쓰여진 것으로서 고착된 특정한 담론”으로 규정될 수 있지만, 넓은 의미에서 텍스트는 “상징을 표현하는 것들 모두”를 지칭한다. 따라서 텍스트는 글은 물론 건축이나 그림, 음악 등 의미를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김왕배, 2000)
이점에서 ‘백화점’이라는 건축, 건물양식, 혹은 하나의 문화 역시 ‘text’가 될 수 있다. 이 ‘text’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상징체이다’라는 뜻이 아니라 그 자체로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사회적으로 분석의 가치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러한 시도는 내부자의 시선으로 낯익은 공간을 낯설게 읽어보려는 시도(박승규, 2009)이며,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가진 ‘힘’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된 요즘의 학문적 경향성과 일치한다. ‘푸코의 지적처럼 일상적인 삶을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으로 구분하는 잘못된 관습으로 인해, 우리의 삶의 토대가 되는 일상 공간의 가치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해왔지만’(박승규, 2009) 이제는 그것을 뛰어넘으려 하는 것이다. ‘백화점’이라는 일상적인 공간을 ‘text’로 삼는다는 접근과 그러한 일련의 작업의 의미는 이러한 의미로 읽어주길 바란다.
참고자료 :
『도시,공간, 생활세계』中, 제 4 장 ‘계급’과 ‘국가 권력’의 텍스트로서의 도시공간, 김왕배, 한울, 2000
『일상의 지리학-인간과 공간의 관계를 묻다』,박승규, 책세상, 2009




덧글